학문을 닦기

Posted in 생각들 by 약간의여유

어렸을 때 교실와 화장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모두 "학문(항문)을 닦는다". 

궁금했다. 용변 후에 항문을 화장지로 닦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왜 학문도 닦아야 하는 것일까?

닦는다는 것은 문질러서 깨끗하게 한다거나 광을 내서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1. 깨끗하게 한다.

과거의 학문은 도덕성을 띠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학문의 근본 목표라고 생각되었다. 유교 중 특히 성리학은 심신의 단련을 강조했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공부란 많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어에서는 공부를 "쿵후"라고 읽는다. 쿵후는 주로 운동과 관련되고, 무술이 유명하다. 쿵후 허슬과 같은 영화에서는 쿵후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엄청난 마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공부란 결국 몸으로 체득되는 진리이다. 몸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닦아내 듯이 우리의 삶과 행동에 그릇된 것이 끼어 있으면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학문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되고, 자신에게 묻은 때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인격에 묻은 때가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이를 교정하려는 행위를 하게 된다.

인간은 동물과 천사 사이에 끼인 존재이다.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이 천사가 될 수가 없다.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깨끗함을 추구하지만 항상 불결함을 발견할 뿐이다. 

아아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자가 없는가? 결국 윤리적인 학문은 "종교"와 맞닿아 있다. 


2. 빛나게 한다. 

어렸을 때 교실이나 복도가 나무바닥이었다. 가끔씩 학교에서는 초와 걸레를 가져오게 했다. 나무바닥에 붉은 칠을 한 다음 초를 갉아서 흩뿌리고 그 위를 걸레로 마구 닦는다. 그러면 나무바닥이 반질반질해진다. 그렇게 하면 붉은 색의 물감이 양말에 잘 묻지 않는다. 지루하기로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장 빠르게 힘주어 닦다 보면 마음도 풀렸다. 

"괄구마광"이라는 말이 있다. 때를 긁어내고 닦아 빛을 낸다는 말이다. 학문의 길은 결국 괄구마광의 길이다. 

반질반질 윤이 난 복도는 걸을 때 기분이 좋다. 어떤 수필에서는 마호가니 책상을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도록 닦아내는 모습을 감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광택제를 써서 내는 빛과, 갈고 닦아서 윤기가 흐르는 빛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반질반질한 나무 책상은 심리적인 애착이 있다. 학문의 길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걸어야 하는 길이다. 영어 공부라도 할라치면 끊임없이 읽을 것을 읽고 또 읽어야 하고, 외운 것을 잊지 않도록 반복해야 한다.   


닦는 행위는 반복적인 행위이다. 한번으로 깨끗하게 닦이는 것은 드물다. 여러번 닦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제대로 닦을 수 있다. 깨끗하게 하거나 빛나게 하려면 결국 반복이 필요하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연습"이라고 했다. 어린 새가 날개짓을 반복하면 곧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날게 되더라도 날개짓을 계속하지 않으면 결국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학문은 길은 험하다. 계속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